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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냥 귀신 나오는 거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합니다. 저는 그때마다 할 말이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제가 진짜 찾아다니는 건 귀신이 아니라 '잘 만든 공포'이기 때문입니다. 장재현 감독의 신작 <파묘>는 그 오랜 갈증을 반쯤은 채워줬고, 반쯤은 새로운 숙제를 남겼습니다.
한국 오컬트 영화, 왜 이렇게 좋은 작품이 없었나
오컬트(occult)란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신비적 세계관을 다루는 장르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귀신이나 악마, 주술처럼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역을 소재로 삼는 것이죠. 제가 이 장르를 좋아한 게 꽤 오래됐는데, 솔직히 국내에서 제대로 된 오컬트 영화를 찾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 수준이었습니다.
한국 공포 영화 대부분은 저예산으로 만들어지는 데다, 도전 의식보다는 해외 유명 작품을 그대로 따라 만든 듯한 분위기가 강합니다. 아이디어는 바닥나고, 공포를 제대로 연출하는 방법을 연구한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장재현 감독의 등장은 말 그대로 이 장르의 오아시스였습니다.
<검은 사제들>에서 한국 배경의 엑소시즘 영화가 가능하다는 걸 처음 보여줬고, <사바하>에서는 그 세계관이 독자적인 영역에 도달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파묘>에 대한 기대는 팬심을 넘어 장르 전체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무속 신앙과 풍수지리, 조상 묘에 대한 전통 관념을 공포의 중심에 놓는다는 발상 자체가 서양 오컬트 문법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었으니까요.
- 장재현 감독 필모그래피: <검은 사제들>(2015) → <사바하>(2019) → <파묘>(2024)
- 한국 오컬트의 핵심 소재: 무속 신앙, 풍수지리, 묫바람(조상 묘에서 뻗치는 불길한 기운)
- 서양 공포 문법과의 차이: 악마 대신 악귀, 성수 대신 굿과 파묘 의식
장재현 연출의 힘과 배우들이 만든 긴장감
영화 초반 한 시간은 제가 직접 봐서 말하는 건데,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장재현 감독이 만드는 이야기는 관객을 억지로 끌어당기지 않습니다. 인물들의 대화와 행동 속에 단서를 조금씩 심어두고, 다음 장면이 궁금해지도록 설계하는 방식이 몹시 자연스럽습니다.
화면 비율부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1.85대 1의 비스타 비전(Vista Vision)을 사용했는데, 비스타 비전이란 일반 시네마스코프보다 세로 비율이 높은 화면 형식으로, 인물 위아래로 공간이 더 많이 확보됩니다. 덕분에 광활한 산속 배경 안에 인물들이 상대적으로 작고 눌려 보이는 효과가 생기고, 그 자체로 '무언가에 압도당하고 있다'는 감각을 전달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연출 선택 하나가 대사 열 줄보다 효과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배우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김고은은 솔직히 이번 작품 전까지 이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초반 대살굿(大殺굿) 장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대살굿이란 강한 살기(殺氣)나 부정을 쫓아내기 위해 무당이 치르는 큰 규모의 굿 의식을 말합니다. 그 장면에서 김고은이 보여준 에너지는 연기라기보다 빙의에 가까웠습니다.
최민식은 이 영화의 기둥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이번 작품에서 자신이 전면에 나서는 대신 나머지 세 배우를 묵직하게 받쳐주는 역할을 선택했습니다. 유해진은 특별한 능력이 없는 평범한 장의사 역할인데, 그래서 오히려 관객이 가장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이도현은 병원 침대에서 오니(鬼)에 빙의된 장면에서 한 번에 납득이 갔습니다. 자칫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장면을 아무런 위화감 없이 소화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연출 디테일도 눈에 띄었습니다. 파묘 장면에서 사브(삽의 일종)로 내려치며 의식을 치르는 묘사, 일본 요괴 누레온나(濡女)의 흔적, 음양사(陰陽師)로 등장하는 기수의 존재. 음양사란 음양오행 사상을 바탕으로 길흉을 점치고 주술 의식을 행하는 일본 전통 직능을 말하는데, 한국 무속과 일본 주술이 한 화면에서 충돌하는 장면은 이 영화만이 가진 구도입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 집계에 따르면 <파묘>는 2024년 국내 개봉 영화 중 손익분기점을 가장 빠른 속도로 돌파한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됐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KOBIS).
역사적 상징이 빛났지만 후반부가 남긴 숙제
악귀의 정체가 밝혀지는 장면은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갑자기 대동아 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외치는 악령의 입에서 제국주의 언어가 쏟아지는 순간,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한꺼번에 들어왔습니다. 대동아 공영권이란 일제강점기 일본이 아시아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정치적 구호로,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착취와 침략 전쟁을 포장한 이념입니다. 그 언어를 귀신의 입에서 꺼내는 선택은 꽤 대담했습니다.
네 주인공의 이름이 모두 독립운동가에서 따왔고, 차량 번호판에 박힌 0301·0815·1945 같은 숫자들. 제가 파묘 장면을 다시 떠올려보면, 상덕이 던지는 동전이 10원이 아닌 100원짜리라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실제 파묘 의식에서는 10원짜리를 쓰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100원짜리 앞면에는 이순신 장군의 얼굴이 새겨져 있으니, 이 작은 선택 하나가 영화 전체의 역사적 흐름을 이미 암시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오니(鬼)의 설정도 흥미로웠습니다. 오니란 일본 전통 민간 신앙에서 등장하는 귀신 혹은 요괴 계열의 존재로, 뿔과 거대한 몸집을 지닌 악신으로 묘사됩니다. 영화 속 오니는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와 연결된 전국 시대 다이묘를 모티브로 삼았는데,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던 수많은 다이묘들이 임진왜란에도 참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면 이 존재가 단순한 일본 귀신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역사 기록과 임진왜란 연구 자료를 참고하면 이 연결 고리가 더 선명해집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럼에도 후반부에서 제가 느낀 아쉬움은 분명합니다. 귀신은 무섭습니다. 물리적 실체가 없고,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니는 거대한 몸집과 힘을 가진 물리적 존재입니다. 물리적 실체가 있는 순간 관객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저걸 어떻게 물리적으로 없앨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따라붙습니다. 미지에 대한 공포가 희미해지는 지점이 바로 거기입니다. 제 경험상 크리처물(creature film, 실체를 가진 괴물이 등장하는 장르)이 공포보다 스릴 쪽으로 기울어지는 이유가 항상 여기에 있었습니다.
화림이 오니와 맞서는 방식도 아쉬웠습니다. 초반에 자신의 제자가 다친 것을 자책하며 단단해지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오니와의 2차 대결에서는 모든 걸 걸고 무당으로서 싸우는 장면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의 묘사는 생각보다 모호하게 처리됐습니다. 봉길의 능력 묘사도 마찬가지였고요. 제가 보기에 이 영화가 <사바하>를 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후반부 30분에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파묘 후반부가 왜 갑자기 다른 영화처럼 느껴지나요?
A. 중반 이후 장르가 미스터리 공포에서 크리처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실체가 없는 귀신을 다루는 공포와 거대한 물리적 존재를 다루는 크리처물은 긴장감을 만드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전환이 일부 관객에게는 호불호를 가르는 지점이 됩니다.
Q. 파묘에 나오는 오니가 실제 일본 역사와 연결된 건가요?
A. 영화 속 오니는 세키가하라 전투와 연결된 전국 시대 다이묘를 모티브로 합니다. 당시 서군 측 다이묘 중 상당수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오니는 단순한 일본 귀신이 아니라 임진왜란의 침략 의지를 상징하는 존재로 읽힙니다.
Q. 파묘에서 100원짜리 동전을 쓰는 이유가 뭔가요?
A. 실제 파묘 의식에서는 10원짜리 동전을 쓰는 것이 관례입니다. 장재현 감독이 이를 100원짜리로 바꾼 건 의도적인 선택으로 보입니다. 100원 앞면에 이순신 장군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역사적 흐름과 항일 정서를 은밀하게 암시하는 장치로 읽힙니다.
Q. 파묘와 사바하 중 어떤 영화가 더 낫나요?
A. 개인적으로는 <사바하>가 장르적 완성도 면에서 한 단계 위라고 생각합니다. <파묘>는 더 많은 관객에게 열린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지만, 미스터리와 공포를 유지하는 밀도 면에서는 <사바하>가 더 집중도 있습니다.
결론
파묘에 10점 만점에 7점을 줬습니다. 좋아하는 감독의 작품이기 때문에 엄격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수작이라는 것, 한국 오컬트 영화의 가능성을 넓혔다는 것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무속과 풍수지리라는 토착 소재가 이 정도의 완성도로 스크린에 올라온 적이 없었으니까요.
다만 장재현 감독은 분명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전반부의 밀도와 역사적 상징의 설계를 후반부까지 유지했더라면, 이 영화는 <사바하>를 넘는 작품이 되었을 겁니다. 아직 이 장르에서 장재현 감독의 최고작은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음 작품이 더 기다려집니다.
공포 영화나 오컬트 장르에 처음 발을 들이려는 분이라면 <파묘> 먼저 보고 <사바하>로 이어가는 순서를 권합니다. 장재현이라는 감독이 이 장르에서 무엇을 하려는지 그 흐름이 보일 것입니다.